‘삼천포아가씨’ 스토리텔링 내용을 보다가 ‘징용’이란 단어는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화라고 하니 삼천포에 실존한 인물로 그 근거가 확실해야 할 것이다.
반일 감정을 선동 소재로 내세워 정치적 선거에 이용하여 이익을 취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대표적인 예로 이승만 대통령의 위대한 업적을 높이기보다는 까 내리는 것으로 친일파를 등용했다는 말로 일갈한다.
유튜브에 올려진 현재 253만 조회 수를 나타내는 ‘백년전쟁’이라는 것에서는 ‘미 CIA 보고’라는 있지도 않은 예를 들어 모든 거짓말을 총 동원시켜 민족의 반역자로 옮겨 놓았다. 그 나레이션을 맡은 이는 김일성, 김정일 사진이 아직도 교실에 걸려있는 일본 조총련계 학교에 후원을 하는 이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고 보면 그와 그들의 목적은 하나다.
이것을 제작한 민족문제연구소라는 곳은 ‘남로당’의 총수 박헌영을 희대의 영웅으로 편집한 10권의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또한 ‘김구’를 ‘주석’이라고 표현하며 그를 높이 평가한다. 이것에서 우리는 이들이 자유민주주의와는 다른 공산주의사회를 신봉하고 있는 이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석’이라는 호칭은 ‘시진핑 주석’, ‘김일성 국가 주석’처럼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에서나 통용되고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문자를 다룸에 있어 우리는 신중을 기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논란의 소지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은 더욱 그렇다.
‘삼천포 아가씨’의 노래에 숨은 이야기를 새겨놓은 것에서 ‘재호’라는 인물이 실재로 삼천포에 있었던 인물인지 한 번쯤은 사실관계를 파악해보았어야 했다. 왜냐면 여기에 정치적 소재로 사용될 수 있는 반일감정을 부추길 수 있는 ‘징용’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애잔하고 아련한 사랑이야기 속에 ‘반일’ 감정이라는 것은 우리 한국인의 정서상 ‘적개심’을 자아낼 수 있기 때문이고 정치적 선동이용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며, 이것은 애튯한 사랑이야기의 심상을 그리기 보다는 다툼의 소재로 변하기 쉽기 때문이다.
실존 인물이라면 내용 그대로 있어도 좋다. 사실이기 때문에, 그러나 가상의 인물이라면 한 번쯤은 고려를 해 보아야했을 정도로 심각할 수 있다.
왜냐면 사회공학적 의미로 볼 때, 한 문장, 한 단어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예로 나치의 ‘괴벨스’라는 인물을 되새겨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가지는 ‘반일’ 감정을 무조건적으로 묻지마 식으로 한다면 일본인들은 그것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실성한 국민 또는 사람으로 보이는 게 좋다면 몰라도,
그렇기에 더욱이 행정에서는 적어도 한 번은 사실적 검증을 거쳤어야 했다. 왜냐면 이것은 공공의 장소에 세워져서는 불특정 다수가 보고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소지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노래들 중, 이야기를 만들어내 즉, 스토리텔링한 노래들을 살펴보았는데, 대부분 다 근거 없이 만들어낸 허구의 이야기들이다.
제천 박달재의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는 박달 도령과 금봉 낭자의 전설이 얽힌, 이러구러 한 사연이 있었다고 이야기 하지만, 다 근거 없이 만들어낸 이야기이고, 약 2년 전에 작고하신 정귀문 가요작가가 작사한 '바다가 육지라면'도 경주시 감포읍 나정리 해변에서 낚아 올린 정한의 노랫말일 뿐이다.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의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반야월 선생의 대표곡으로 한국전쟁 당시 어린 딸을 잃은 작사자의 경험이 창작 배경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거와 마찬가지로 모두 작가가 각색한 것으로 보면 되겠다.
‘소양강처녀’, ‘처녀뱃사공’과 마찬가지로 ‘삼천포 아가씨’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일제식민지를 스토리텔링 배경으로 삼은 것은 오직 ‘삼천포아가씨’ 하나뿐으로 그 의도가 심히 의심적으며, 실화라고 새겨놓은 것은 더욱 그렇다.
‘삼천포아가씨’, ‘영산강 처녀’을 대표곡으로 남긴 작곡가 송운선 선생은 1년 전에 별세를 하였다고 하니 ‘재호’라는 인물의 정확한 근거는 알아볼 길이 없다.
참고로 일제에서 징병제와 징용령이 정식으로 적용된 것은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기 시작한 1944년부터였으며, 농촌의 피폐로 살길이 막막했던 소작농 출신들은 1938년부터 지원병으로 참전하게 되었고, 징용, 징병된 자들은 지금의 공무원과 같은 가족수당까지 나왔다고 한다.